젠더 무법자, 케이트 본스타인 지음, 바다출판사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관지 블로그 주소: http://laborzine.laborparty.kr
“보다 적극적/급진적으로 젠더 개념을 사유하기 위하여”
‘젠더 개념을 사유한다’는 말이 낯설 수 있는 이들을 위해, 저자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저자 케이트 본스타인은 195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유년시절의 이름은 ‘알버트’였다. 30여년 전 성기 재지정 수술을 통해 페니스를 질로 바꾸었다. 그러나 케이트는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 그 어느쪽으로도 정체화하지 않는다. 케이트는 스스로를 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했지만, 케이트의 파트너는 현재 성별전환 순서를 밟고 있으니 케이트는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 글을 읽으며 혼란이나 짜증을 느낄 것이다.
남성/여성, 동성애자/이성애자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없는 이 사람, 스스로를 ‘젠더 무법자’라고 부르는 케이트 본스타인은 미국 트랜스젠더/성소수자 운동의 살아있는 전설이며 연기자, 극작가, 저술가이다. 올 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이 책의 원어 초판은 20년 전에 출간되었으며 이 책은 여러 국가에서 젠더 개념에 대한 입문서로, 강의 교재로 널리 읽히고 있다.
스스로를 남성/여성이라는 두 성별중 하나로 확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케이트는 성별을 계급이라고 판단하고, 젠더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 꼼꼼히 이름붙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젠더를 사회적 구성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갓 태어난 아이의 성별을 의료학적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성별에 속한다고 느끼는지를 성별정체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안타깝게도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이 속한다고 느끼는 성별이 같은 것이 자연스럽다고 믿으며 그 성별의 범주에는 남성/여성 단 두 개만이 존재한다. 사회적으로 한 인물이 어떤 성별에 속하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은 성역할이며, 외모나 행동, 문자, 생물학적 성별 등의 젠더 귀인 (gender attribution)을 통해 사람들은 다른 이가 어떤 성별에 속하는지 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또한 어떤 사람과 어떤 형태의 성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를 표현하는 성적 지향을 통해 젠더를 파악하기도 한다. 케이트는 이러한 욕망을 “이전에나 지금,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경험하고 있지 않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경험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당신은 자신의 욕망을 남성/여성이라는 단 두개의 변수만으로 이루어진 시불변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가? 질문을 조금 비틀어본다면, 당신은 정체성 없는 당신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가? 적어도 이 사회는 정체성이 없는 욕망을 보여주는 데에는 아주 서툴고, 이는 많은 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꼼꼼히 이름붙여 놓은 젠더 체계에는 규정집이 존재한다. 이 규정집의 핵심은 젠더는 자연스럽다는 믿음에 기반한다. 세상에는 오로지 두 개의 성별만이 있으며 이 중 하나에 귀속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기는 성별을 보여주는 필수적 표지이며 성별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성별을 제외한 나머지는 농담이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진지하게 받아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케이트는 이러한 젠더의 비밀을 폭로한다. 그 비밀은 모호성과 유동성이다.
젠더는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 젠더의 또 다른 비밀이다. 성별의 관례를 위반할 방법은 많다. 그 사람이 세계를 보는 관점에 달렸다. 위반 범위는 어느 정도 덜 완고하게 젠더화되는 것을 선호하는 데서부터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데까지 이른다. (중략) 그리고 난 젠더는 유동적일 수 있고 이는 모호함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호함이 성별의 관례에 들어맞는 걸 거부하는 것이라면, 유동성은 이것 아니면 저것인 젠더로 남아 있길 거부하는 것이다.
(91-92페이지)
우리는 스스로를 모호하고 유동적인 존재로 정의함으로써, 견고하게 짜여 있는 젠더 체계의 그물망을 미끄러져나갈 수 있으며 젠더 규칙들을 뛰어넘는 ‘젠더 무법자’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가장 첫 걸음은 수많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본을 뒤흔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성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XY 형태의 성염색체에서 오는가? 그러나 조류의 경우 암컷이 ZW형태의 성염색체를, 수컷이 ZZ 형태의 성염색체를 가진다. 그렇다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더 높기 때문일까? 그러나 호르몬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하이에나의 암컷은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수컷보다 높으며 암컷의 성기는 페니스의 형태를, 수컷의 성기는 질의 형태를 띄고 암컷이 수컷 뒤에 올라타는 형태의 교미를 한다. 그렇다면 법에서 오는걸까? 그러나 사람들은 매번 법을 바꾼다. (그리고 많은 국가에서 법적 성별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성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신화는 몇 가지 질문과 반례로 무너질 수 있는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성/여성 이외의 성별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공포는 트랜스섹슈얼리티를 자신이 맞다고 느끼는 성별에 속하지 못한 ‘질병’으로 판단하고, 전문가는 트랜스섹슈얼에게 당신이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침묵하라고 조언한다. 수많은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문헌들은 비트랜스섹슈얼이 서술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트랜스섹슈얼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깔끔하게 끼워맞추려는 비트랜스섹슈얼의 세계관에 근거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출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하지만 결코 지배적 관념에 도전하지는 않는 낭만적 저작들.
(35페이지)
결국 이런 주장들은 얌전히 침묵하던 트랜스섹슈얼 당사자들이 만났을 때에 서로는 더 큰 혼란을 느끼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많은 트랜스섹슈얼 당사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젠더 모호성과 유동성에 대한 신화와 오해들은 – 우리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잘못된 몸에 갇혀 있다, 우리는 가장 학대받는 사람들이다 등 - 계속 생산되고 있으며, 케이트는 이 오해들에 대해 차분히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트랜스섹슈얼에 대한 오해를 생산해내는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공포를 조장하는 세력을 케이트는 ‘젠더 수호자’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젠더 무법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이들을 안보이는 존재로 혹은 머나먼 존재로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그들이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모욕’이다. 이러한 모욕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케이트는 광대, 바보, 익살꾼, 마술사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들은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비웃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농담거리로 삼아 문화에 각인된 거짓을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 그 분노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이어야 하고 무언가 바꿀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한다. 우리를 웃음거리로 보는 이 문화의 경향에 저항한다.
(136페이지)
젠더 수호자들이 젠더 무법자들에게 모욕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먼저 스스로를 농담거리로 삼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연적이다. 침묵하지 않고 규범을 뛰어넘는 어릿광대, 익살꾼, 마술사와 같은 세 번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젠더 무법자들이 이 세 번째 존재가 되고, 세 번째 공간을 창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케이트는 젠더에 대해 한 번 더 질문을 던지는데, ‘왜 사람들은 젠더를 혹은 젠더 체제를 붙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허락을 받았든 안 받았든, 어떤 공간, 사람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지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남성 특권’이다. 남성 특권은 남성이라면 모두 갖는 것은 아니고, 소수의 여성들도 남성 특권을 실현한다. 다만 남성으로 양육된 경우 이 특질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케이트는 자신이 현재 성기 재지정 수술을 마친 상태라고 해도, 남성 특권을 단번에 버린 것이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리고 성별/젠더가 정말 자연스러운지 되묻는다. 케이트에게 젠더는 계급 체제이며, 그렇기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는 것이, 권력차가 일어나는 것이 불가피하다. 결국 이러한 체제를 깨기 위하여 케이트는 현존하는 성별과 성 역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궁극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을 넘나들자고 제안한다. 젠더이분법을 넘나들 수 있는 세 번째 공간이 케이트에겐 연극이었다. 그래서 책의 뒷부분은 케이트가 왜 극작가가 되었는지와, 이 사람의 저작은 ‘숨겨진 아 젠더’의 대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극은 젠더의 모호성과 유동성을 보여주는데에 극적인 장치가 될 수 있다. 극본 속의 배우들은 실제 자신의 성별을 넘나드는 연기를 보여주며, 어느 한 쪽의 젠더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케이트에게 이 세 번째 공간이 연극이었다면, 나에게 이 세 번째 공간은 퀴어퍼레이드였다. 많은 사람들이 퀴어퍼레이드를 찾아오면 당황하고는 한다. 그 당황스러움은 아마 맨 첫 문단을 읽었을때 어떤 사람들이 느꼈을 당황과 비슷할 것이다.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당연하게 믿었던 것이 사실은 허구인 것을 알았을 때에 느껴지는 혼란에서부터 기인하는 당혹감. 당신이 그 혼란에 기꺼이 몸을 싣고, 그 누구도 당신의 젠더를 명명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는 것으로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젠더를 가지고 노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한 세 번째 공간이 늘어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답답함을 느끼거나, 원치 않은 괴롭힘을 받는 사람들이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