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라이나의 사생아 도로시 앨리슨, 신윤진, 이매진
엄청나게 끔찍한 내용을 끔찍함 그대로 보여주는 책. 그러나 등장인물들 사이의 사랑이 보여서 그만큼 마음이 아프다. 번역자가 국문학 전공자여서 그런건지 아니면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많이 하면서 번역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나오는 '아가, 아가' 하는 말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러한 번역에 대한 호불호 혹은 '더 나은 번역'의 여부를 떠나서, 감정을 더 많이 증폭시켰다는 느낌. 이매진에서 '무지개반사'라는 시리즈명으로 내기 시작한 첫 번째 책. 근데 왜 무지개반사인지는 모르겠다. 무지개라고 써있어서 퀴어 관련 이슈가 나오나 했는데 딱 두 줄정도 나옴. 그게 끝..
애니는 본을 사랑하면서도 결국 글렌을 택한 이유를 딱히 작가나 작중인물들에게 묻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여자아이를 만들어 낸 작가의 저력에도 감사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사람들은 처참한 현실을 바라보기를 참 좋아하지 않는거같다. 나도 그랬고. 그러니까 이 책이 그렇게 수난을 겪었겠지..남들이 보기엔 항상 불행할것만 같은 삶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글들을 좋아한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본을 사랑하고 본이 사랑하는 이모와 삼촌들이 있어서, 그래도 본은 외롭지 않았다고, 믿고.
주여, 그린빌카운티에 불덩이를 퍼부으시든 천벌을 내리시든 뭔가 조치를 취할 때가 아직도 안 된겁니까? 아직도 죄악과 비탄과 서서히 차오르는 고통이 불충분합니까? 아직도 당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겁니까? 애니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마음속은 늘 번잡했다. 28
앨마 이모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꼭 끌어안았다. 너무 활짝 웃어서 코가 작아 보였다. 이모는 마치,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내가 태어난날부터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 같았다. 나는 기억조차하지 못하는 일에 고마움을 전하고 칭찬해주려고 기다린 사람 같았다. 42
"이모 말을 믿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중에 사랑만큼 좋은 것은 없단다. 돈도 안 들고 기분도 좋아지거든. 너도 곧 알게 될거다. 좀더 클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 곧 알게 될 테니."
리스는 불편한지 얼굴을 찌푸리고 계속 꼼지락댔다. 그러다가 방에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질척거려! 다들 질척거린다고! 난 그런 짓 절대 안 할거야." 93
"남자한테는 욕구라는 게 있잖아. 남자는 욕구가 있다고. 그런데 마누라는 임신을 했고. 자궁 속 아기가 다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한 짓을 해야겠어?"
웨이드 이모부의 어이없는 불평은 이모들의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모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하며 웃어댔다. "남자한테는 욕구가 있대. 그럼 여자한테는 뭐가 있어야 하지?"
"남자!" 이모들 중 한명이 매번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다들 눈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웃어 젖혔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나도 함께 웃었다. 나는 여자의 한 명으로 이모들 사이에 그렇게 끼어 있는 게 좋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사촌오빠들이나 온 세상을 향해 침을 뱉고 으르렁대는 고압적인 남자들하고는 확실히 구별되는, 강력하면서도 음란한 뭔가의 일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134
그 안에서 나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승리자요 주인공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매를 맞으며 영웅 행세를 할 수 없었따. 온몸이 콧물과 고통으로 뒤덮일 때까지 그냥 매를 맞는 일만이 존재했다. 165
그 찬송가에 담긴 의도는 바로 이것, 자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게 만드는 것,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동시에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내게 들어맞았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199
다른 것은 잘 몰라도 허기만큼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게 신을 향한 허기인지, 아니면 사랑을 향한 허기인지, 그것도 아니면 용서를 향한 허기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구원은 복잡한 것이었다. 217
나는 원하고 또 원했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예수든, 신이든, 오렌지꽃 향기든, 내 목구멍을 가득 메운 다크초콜릿색 공포든, 나를 다치게 하고 나를 아프게 하는 뭔가를 원했다. 221
"아 세상에. 나는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앓는 소리를 해대며, 기회를 노리지도 않고 뭐든 낯선 일은 해보지도 않는 데 신물이 나. 본, 네가 그런 종자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네가 세상에 나가 멋진 일들을 해낼거라고 믿는다. 사람들 애간장을 녹이고 이 늙은 이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해라." 267
내 삶은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불쑥불쑥 어딘가에 멍하니 멈추어 서 있었고, 때로는 죽음이라는 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글렌의 짙푸른 눈동자가 내 쪽으로 향하기만 해도 몸을 떨기 시작했고, 그 뿌리 깊은 떨림을 글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안 돼, 나는 밤마다 속삭였다. 안 돼, 나는 죽지 않을거야. 안 돼,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안 돼. 298
"그렇지만 얼 외삼촌은 젊고 좀 모자란 듯 맹한 여자를 좋아해. 다른 남자들처럼, 쉽게 감격하는, 그러니까 자기가 감동을 줄 만한 행동을 전혀 안 해도 막 감격하고 그런 여자들을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그런가, 네 외삼촌이 데려오는 여자들을 보면,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애들만, 길 잃은 강아지 같은 애들만 데려오는지. 다정한 말 몇 마디만 건네도 네 외삼촌한테 홀딱 빠지는 애들이 오죽하겠니. 걔들은 꼭 햇볕을 잔뜩 받아서 가지가 축 처질 정도로 잘 익은 과일 같아. 누가 와서 따주기를 기다리는 과일 같다고." 372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아. 다들 자기 위치에서 죽을 힘을 다하며 살아가는거야." 374
대개 나하고 비슷한 가정, 그러니까 범죄율이 높고 상대적으로 친척 중에 전과자가 많은 남부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기 자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쓰지 않고 강간과 학대와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길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부유한 계층에서 자기 자식을 학대하는 비율은 가난한 계층하고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폭력과 범죄 역시 남부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런 현실을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편견이 오죽 심각하면 사람들은 사회학적인 통계와 개인적인 고백들까지 부인하려고 든다. 461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