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stri.destride 2013. 11. 25. 20:02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저자
인권운동사랑방 (엮음)김준우허오영숙김일란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3-04-1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어느새 눈물이 고이다가도 미소가 번지는 이 시대 소수자들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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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티그마'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반차별 활동가의 방황의 기록 –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올해 5월, 책 한 권을 받아 들었다. 2년 전 내가 제작에 관여했던 책이었다. 책은 가벼웠고, 표지는 흑백이었다. (책의 이름은 『수신확인-차별이 내게로 왔다』이다.) 학내에서 활동할 때 매체나 자료집을 몇 권 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서점에서 유통되는 책이 활동의 결과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제작하는 동안 사정상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지만 책을 작업하면서 느꼈던 내 소회를 이야기하려 한다.

책을 엮어낸 단체에서 2011년부터 활동을 했다. “복합차별[각주:1] 당사자의 생애 주기에 따른 차별 사례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채록하고 차별사례 보고서로 엮어내려 한다”는 기획을 우연히 엿본 것이 계기였다.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기보다는, 조금은 멀리 있는 듯한 사람들을 섭외했다. 원래의 취지대로 ‘복합차별’ 요소가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차별의 요소가 두 개 이상인 사람들을 섭외했다. 복합차별당사자라 하면 왠지 범위가 좁혀질 것 같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단일차별 당사자를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질적 연구방법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실제로 질적 연구를 하는 분을 초청해서 한 시간가량 교육을 받았다. 인터뷰 하기 전에는 왠지 모든 게 잘 될 것 같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를 하고 나니 자괴감이 엄습했다. 우리는 ‘객관적’이었어야 했는데 정작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 원래 질적 연구의 인터뷰는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진행된다는데, 내가 진행한 인터뷰들은 두 시간이 꼬박 넘어갔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인터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걱정은, 우리가 모아 온 이야기들을 육하 원칙에 따른 복합차별 사례로 분절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차별을 이야기 할 때, 그 모습들은 다음 나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낮은 임금을 받고,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주로 학력이 낮고, 주로 취약계층이며, 건강이 좋지 않고, 타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며, 폭력에 희생당하는 모습들.

그러나 우리가 받아 든 이야기들은, 오히려 유연하게 차별의 틈새를 미끄러져나가고, 기쁨의 순간들을 소중히 간직하며, 틈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양새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뛰어넘는 만큼 사람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금, 돌아가야 했다. 차별은 정말로 모든 불행의 근원이며 없애버려야만 하는 절대 악일까?

‘차별요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을 우리는 주로 정체성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정체성들이 있다.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학력, 인종, 국적, 나이, 계층 등등. 한 가지 사례로 성별 정체성을 이야기해 보겠다. 통상적으로 성별 정체성에는 ‘남성/여성’만 이야기되지만, 트랜스젠더가 있고, 트랜스젠더에도 MTF/FTM, 수술/비수술[각주:2]이라는 명명이 있고, 트랜스젠더 외에도 시스젠더, 젠더퀴어, 젠더플루이드 등등 수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들에 이름 붙이기(labeling)가능할까? 물론, 자기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간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반차별 운동을 하는 것, 더 나아가 정체성의 정치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 이러한 이름표들을 끝도 없이 달고 있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많은 정체성들이 겹쳐져서, ‘나’라는 사람이 되는 건데, 나는 오히려 그 수많은 정체성이라는 이름들에 압도 당해 온 것은 아닐까? 어느 한 가지 정체성만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님을 알면서도, 저 사람은 이 요소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쉽게 단정지었던 것은 아닌지. 어떤 사람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일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니, 그이가 체불된 임금을 받고,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게 되는 순간 바로 행복해질까? 장애인고용 촉진법으로 인해 한 장애인이 고용되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잘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이는 행복할 수 있을까?

반차별 운동은 이러한 ‘대상화’와 싸우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활동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미 어떠한 틀을 만들어 버렸고, 그래서 활동가들의 외침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리워진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순간, 가려지는 수많은 결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외부로부터 어떠한 타격이나 공격이 들어올 때에, 그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취하는 전략이 있는데, 나는 다른 맥락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체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사회에서 한 사람의 인격이 삭제되는 순간과 그로 인해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까지 차별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데서 느끼는  답답함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복합차별사례 보고서를 작성하려던 계획을 폐기하고, 이야기들을 재구성하기로 한다.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로, 대학 수업에서의 강연문으로, 친구에게 전하는 이야기로, 누군가와의 인터뷰 기록 등등. 활동가들의 ‘겁 없는’ 말하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다. 그이들의 이야기 뒤에는, 이야기를 경청한 이들의 전언이 실렸다. 그래서 제목이 ‘수신확인’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띄우고,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책은 차별 당사자들은 불행하기만 하다는 통념을 깨는, 자신의 정체성들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잊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기도 했다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누군가의 삶이 녹아 나온 기록이기에, 차별 이슈를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듣는 이의 힘이 덜 빠지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정체성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이들의 정체성이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차별의 기록만이 아닌 다양한 궤적을 남기도록, 긴 호흡으로 엮어 나간 책이다.

이 책을 엮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가 왜 이렇게 반차별 운동에 매달려 왔는지에 대해 그나마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삶은 지난하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 타인이 예상하는 나의 삶과 내 생각 사이의 괴리에 나는 자주 숨이 막히고는 한다. 내가 (여성이므로) 가죽 가방을 좋아할 것이고, 내가 이성애자로써 결혼을 할 것이며 (여성으로써) 아이를 낳을 것이니 흡연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 또한 이러하고 저러한 전략을 취한다. 아직 그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존중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토록 괴롭게 만드는 누군가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치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좀 더 긴 호흡으로 나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엮어 놓은 이채로운 열 편의 이야기들을 당신 또한 읽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당신의 삶과 마주할 수 있기를, 그래서 더 큰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나와 타인이 마냥 단절된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서로의 이야기는 온통 다른 이야기가 아니며, 그리하여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따뜻한 전언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1. 복합차별이란 2개 이상의 차별 요소를 가진 경우를 가리킨다. 아직 논란이 많은 단어이지만, 한 사람의 차별이 한 가지 요인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체성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기인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복합차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본문으로]
  2. MTF: Male to Female, FTM: Female to Male로, 각각 태어나면서 신체적 남성/여성으로 인식되었으나, 여성/남성으로 인식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수술/비수술: 신체에 대한 수술(성기 재구성, 유방 축소/이식 등)을 하거나 하지 않은 경우를 가리킨다. 시스젠더: 자신의 신체적 성별과 스스로 인식하는 성별이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 젠더퀴어: 넓은 의미의 트랜스젠더의 쓰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전환’의 개념을 제거하고 어느 성별에도 부합하지 않거나 성별의 구분 자체를 문제시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젠더플루이드: 스스로의 젠더가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유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트랜스로드맵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