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벤구르, 안드레이 플라토노브, 을유문화사
그는 사심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질에서 나오는 노동이 언젠가 오직 돈 하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그때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 믿었다. 아니 심지어, 종말보다도 더 나쁜 것이다. 마지막 기술자가 죽은 후에는 태양의 식물들을 먹어 치우고, 기술자의 제품들을 망가뜨리기 위해 최후의 악당들만이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78
이제 그는 기계와 제품들에 더 이상 열렬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어쨌든 사람들은 가난하고 불쌍하게 살아갈 것이고, 또한 세계는 어떤 냉담한 환상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너무나 지쳐서, 자신의 고요한 죽음을 정말로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80
단지 매일 밤 책을 읽는 사샤를 볼 때마다, 그의 내부에서는 사샤에 대한 슬픔이 끓어올랐다.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사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책을 너무 파지 마라, 만약 책 속에 무엇인가 진지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오래전에 인간들은 서로를 안아주었을 것이다. 88
음울한 당원은 더 낯을 찌푸렸다. 그는 인민대중의 어마어마한 무지몽매를 생각해 보고, 이 무지몽매함이 당을 위해서 미래에 얼마나 성가신 것이 될지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 그는 벌써 피곤해져, 자하르 파블로비치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98-9
"도대체 뭐가 필요하오?"당원은 당황해 했다.
"사유 재산을 줄여야 해요."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자신의 생각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감시하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하고요. 그러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올 거에요. 정말이오."
"그건 무정부주의요!"
"도대체 뭐가 아나키즘이란 말입니까? 그냥 스스로가 자급자족하는 삶이지!" 99
"그들이 볼셰비키든 아니든 위대한 이론가든 너는 살펴보고 또 살펴봐야 해." 자하르 파블로비치는 이별의 말을 했다. "기억하렴. 네 아버지는 물에 빠져 죽었고, 네 어머니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영혼 없이 살고 있지. 바로 이게 위대한 일이야.... 볼셰비키는 텅 빈 심장을 가져야만 하거든.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도록 말이야..." 101
"너 안 죽었어?" 그녀가 물었다.
"그래." 알렉산드르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살아 있었구나?"
"나도 살아남았어. 우리는 이제 함께 살 수 있게 된 거야. 지금은 괜찮니?"
"좋아. 넌?"
"나도 괜찮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말랐어? 아마도 그건 네 안에 죽음이 있어서 그렇겠지. 그런데 넌 아직도 죽음을 내보내지 않았니?"
"너, 내가 죽었으면 했어?" 알렉산드르는 물었다.
"모르겠어." 소냐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많고, 죽기도 하고, 또 살아남기도 하니까." 127
대중이 잇는 곳에는 곧바로 우두머리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대중은 우두머리를 통해 그들의 헛된 희망을 보장해 두는 것이며, 우두머리는 대중에게서 필연적인 어떤 것을 뽑아내는 것이다. 167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낮의 마지막 온기를 지상으로부터 빨아들이고, 새벽을 앞둔 대기가 높은 곳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창문으로는 흡사 달빛 어린 골짜기의 수풀처럼 빛을 바꾸는 이슬 젖은 풀이 보였다. 저 멀리 어떤 급행열차가 지치지도 않고 경적을 울렸고, 묵직한 공간이 기차를 압박했으며, 기차는 큰 소리를 내면서 황량한 공간의 틈 속으로 달려갔다. 171
그러고 나서 코푠킨은 다시 잠들었다. 그는 정신적 의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을뿐더러, 그것을 혁명의 적으로 여겨 그 어떠한 정신적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미리,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생각해 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보이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몯느 적을 파괴하기 위해 무력으로 공훈을 세우는 것뿐이다. 199
그런 똑똑한 인간들을 파신체프는 좋아하지 않았다. 실제 삶에서는 어리석고 불행한 인간들이 똑똑한 인간들보다 더 선하다는 사실과 자신의 삶을 행복과 자유로 더 잘 변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엇던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학자나 부르주아보다 더 어리석지만, 그래도 그들은 더 진실하고, 그렇기에 그들의 운명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파신체프는 비밀스럽게 믿고 있었다. 237
좀 더 분명히 의미를 표현한 설문지도 있었는데, 그 설문지에는 시민들의 직업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감옥 열쇠 관리 업무, 삶의 진실을 기다리는 업무, 하느님을 참을 수 없이 기다리는 업무, 죽음과도 같은 고행, 순례자들에게 책 읽어 주는 업무, 소비에트 권력에 대해 공감하는 일 등이었다. 체푸르니는 이 설문지들을 연구했으며, 주민들의 직업이 복잡해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바로 떄맞춰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끔찍하게 함든 일이다'라는 레닌의 슬로건을 생각해 내자,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322
"이봐 체푸르니, 자네 이 여자를 바로 레닌 앞에 데려가보지 그래. '자 여기 공산주의가 있기 이전에 만들어진 여자요!'라고 한번 말해 보라고. 나쁜 인간들 같으니!" 337
"프로코피는 내 지도 하에 이렇게 공식화해서 정리한적이 있지. 지혜라는 것도 집과 마찬가지로 소유 자산이며, 그렇다면 결국 지혜도 비과학적이며 연약해진 자들을 억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자네가 바보들을 무장시키게." 코푠킨은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러면 지혜로운 자들이 그들에게 분말을 뿌리러 기어 들어갈거야! 나를 봐, 자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형제여, 나도 바보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완전히 자유롭게 살고 있어." 340
체벤구르의 공산주의는 이 스텝의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꿈의 힘으로 낮의 내적인 삶의 피로를 치료하고, 그동안 자신의 신념을 중단하기 때문이었다. 343
아내들은 평평하고 흔적도 없는 무덤의 흙덩어리 위에 몸을 던져 슬퍼하려 했다. 하지만 아내들은 밤이 지나는 동안 냉담해졌고, 슬픔을 이미 견뎌 내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368
우리는 그곳에서 전 공산주의를 한번 계측해 보도록 하지. 공산주의의 정확한 설계도를 만들어서, 이곳으로 돌아오면 어떨까. 그러면 지구의 6대주 어디서라도 공산주의를 쉽게 만들 수 있을걸세. 일단 우리가 체벤구르에서 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말이야. 376
"저 여자 목소리는 감동적이고, 체벤구르에는 예술이 없으니... 살아날 수 있도록 여자를 밖으로 꺼내 주는 게 어떨까?" "안 돼요!" 제예프가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 너무 힘이 빠져 있고, 게다가 좀 모자라요...이 여자를 먹일 음식도 없고, 또 부르주아 여자란 말이오. 뭐 아무 동네 아낙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저 여자는 버려진 잔재의 호흡일 따름이오...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술이 아니라 공감이요." 428
"왜 그런진 몰라도 전쟁을 하거나 혁명을 겪을 때는 사람들이 항상 꿈을 꾸더군요." 제예프가 말했다. "그런데 평화로운 시기에는 꿈을 꾸지 않는단 말이죠. 흡사 나무 그루터기들처럼 조용히 잠들죠." 434
"나는 태어나서 야경꾼도 한 번 해 본적이 없소. 내가 말하는 것은, 권력이라는 것은 서툴러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 자리에는 제일 쓸모 없는 사람들을 앉혀야 된다는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야 모두 쓸모 있는 분들 아니오." 462
'이게 뭐가 공산주의인가?' 코푠킨은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의심을 품고는 축축한 밤으로 뒤덮인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공산주의로부터 한 번 더 숨을 쉴 수 없었고, 공산주의 치세에서 사람이 나타났지만 죽고 말았지. 이건 전염병이지 공산주의가 아니야. 코푠킨 동지, 이제 여기서 저 멀리 떠날 때라고.' 484
"내게 중요한 건 아이가 당신 꿈속에서라도 살아 있었다는 거요. 그건, 아이가 당신에게서도 체벤구르에서도 약간 더 살았다는 거니까..." 여자는 슬픔과 자기 생각에 빠져서 침묵했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에겐 내 아이가 소중한 게 아니라, 당신의 상상만이 필요한 거에요! 제발 저기 저 마당으로 가버려요. 난 혼자 남는게 익숙하니까. 이제 아침까지 꽤 오랫동안 내 아이와 함꼐 누워 있을 수 있다구요. 아이랑 있을 시간을 빼앗지 말아요!"
체푸르니는 아이가 꿈속에서나마, 아니면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나마 자기 영혼의 나머지를 살았으며, 체벤구르에서 곧바로 영원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한 채, 여자가 묵고 있던 집에서 나왔다. 491
'공산주의 안에서도 저토록 슬퍼하다니. 저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만으로 부족한 걸까?' 507
어머니나 딸을 얻은 자들은 집에서 자주 나오지 않았으며, 알 수 없는 물건들을 만들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가족들과 한지붕 아래에서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과연 바깥 공기 속에서보다 집 안에서 더 행복할까? 623
"지금 나에게 공산주의가 무슨 소용이오? 나에겐 이제 그루샤가 동지고, 뭔가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일도 다 못해 주고 있는데. 지금 생명이 너무 많이 소모돼서 음식도 잘 못 얻고 있소...." 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