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우물, 래드클리프 홀, 임옥희 역
위에 책소개에는 '여성 동성애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라지만 과연 이 책에서 나오는 스티븐이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녀 콜린스를 사랑하던 어린 시절 스티븐은 스스로 '어린 넬슨'옷을 입고 어린 넬슨처럼 행동했고, 그 뒤에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셔츠를 입고 바지를 입고 스스로를 '남자'처럼 꾸미고 살았는데. 스티븐이 FTM 트랜스남성인지 레즈비언 부치인지 나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기에 이 책소개의 '여성 동성애'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스티븐은 딸로 태어났고, 딸의 역할을 어릴때까지는 수행했으며, 어머니는 그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스티븐의 분열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티븐을 대하는 태도 사이의 간극에서부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스티븐을 아들로 인정하려고 했고, 어머니는 인근 지역의 여성과 스캔들을 일으킨 스티븐을 혐오하며 쫓아냈지만 ..
왠지 고독의 우물은 작가 래드클리프 홀의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책 날개에 붙어있는 홀의 사진을 봐도 그렇고. 유산을 받아서 글을 쓰면서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상황이 일치하는 것도 그렇고. 그러나 전쟁이라는 상황을 일으킨 사회에 대한 비판의 부재와 더불어 전쟁을 스티븐이 국가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과정으로 차용한 장면 등을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티븐의 성별정체성 그리고 그/녀가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통상적 이성애와 별 다를 바 없어보일 수 있다는 사실, 전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 자기 자신의 계급적 자각이 전혀 없는 모습 등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겠으나 영문학의 아름다움 그리고 영국 및 아일랜드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맘껏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굳이 문학이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학은 신이 아닐진대.. 내가 영국 및 아일랜드의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일랜드의 자연을 좋아한 나머지 내가 아일랜드에서 일이년 정도 체류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덧붙이자면, 격렬하고 웅장하게 치닫는 결말이 압권이다.
이제 <파리는 여자였다>를 읽을 것이다.
래드클리프 홀
애너는 작은 손이 자기 팔꿈치를 잡는것을느꼈다. 늘 그랬듯 손가락의 힘이 기이하게 셌다.필립 경의 손처럼 강하고 효율적인 손놀림이 전달되었다. 이것은 언제나 애너의 심기를 불편하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티븐에게 미소지었고 아이가 자신을 안내하여 물웅덩이를 피해 그 사이사이로 이끌어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고맙구나 얘야. 넌 사자처럼 강하구나." 그녀는 목소리에 불쾌감이 묻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했다. 50-51
불행하면서도 행복했다. 그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스티븐이 이해하기에 그 감정은 너무 큰 것이었따. 그래봤자 스티븐은 어린아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모턴의 영혼은 그녀의 일부가 될 것이며 이미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에 언제나 자리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세월의 흐름과 스트레스와 인생의 추악한 면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채 그곳은 초연하게 남아 있었다. (중략) 스티븐과 모턴이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그런 부분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의 고독처럼 끔찍한 고독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 것이었다. 54
그가 다니는 학교를 부러워했고 그가 거들먹거리면서 언급하는 남자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다른 모든 녀석들!"로 지칭하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나무를 탈 수 있는 그의 권리, 크리켓과 축구를 할 수 있는 그의 권리, 완벽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의 권리를 부러워했다. 무엇보다도 남자가 된다는 것이 인생에서 특권이라고 보는 그의 엄청난 확신을 부러워했다. 75
"그런데 전 아들이 아니잖아요, 아버지." 그녀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어린 시절 이후로 수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무겁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이 말을 듣고 필립 경이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사랑의 눈길이기도 했지만 또한 연민과도 흡사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만나서 교차하고 엉기면서 한순간 서로를 말없이 붙잡았다. 101
"넌 용감하고 팔다리가 튼튼해. 그에 덧붙여 네가 현명해졌으면 한다. 너 자신을 위해서 현명해졌으면 한다, 스티븐. 최선의 삶은 최고의 지혜를 요구하는 법이니까. 네가 책을 벗 삼아 배웠으면 한다. 언젠가 넌 책들이 필요할 게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망설였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테니까.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렇다시피 말이다. 책은 좋은 친구란다." 101
"스티븐, 이리로 오너라.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라. 명예가 무엇이냐, 내 딸아?"
그녀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아버지의 눈길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나의 명예입니다." 그녀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102
어린 시절의 인상들, 즉 언덕에 부서지던 황금빛 햇살, 뻐꾸기의 첫 울음소리, 신비하고 낯선 매혹들, 아버지와 함께 말을 타고 사냥터에서 돌아오던 기억들, 헐벗은 이랑들, 헐벗은 이랑의 의미들, 그 이후에는 기이한 희망과 기이한 동경, 기이한 기쁨과 심지어 좀 더 희한한 좌절, 체력이 주는 기쁨, 눈부신 육체적인 힘과 용기, 건강의 기쁨과 충분한 수면과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 말안장 아래에서 도약하는 래프터리의 기쁨, 래프터리가 앞을 향해 바람을 가르고 나가면 뒤로 물러가는 바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까? 갑자기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둠이 버티고 있다. 갑작스러운 거대한 공허. 모든 것은 무와 어둠이다. 갑작스러운 두려움. 117
이런 처녀들을 경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녀에겐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 불현듯 그들이 대단히 행복해 뵌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함께 뒷소문을 즐기면서 스스로를 확인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128
그녀에게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에 위배되는 모습을 감지했다. 두려움은 그들에게 자연을 감시하는 역할을 부여해 주었다. 188
가정이란 것은 두 사람이 함께 존중할 만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존경받는 것. 그런것이 가정이었다. 젊어서는 사랑할 권리를 가지고 늙어서는 서로 헤어지지 않는 두 사람, 가난하지만 한없이 부러운 두 사람, 남들의 눈에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고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두 사람, 세상을 두려움없이 직면할 수 있는 당당한 사람들,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267
용기를 내. 비록 무거운 짐을 졌더라도 그냥 최선을 다하면 돼. 무엇보다 훌륭하게 행동해. 너와 같은 짐을 진 자들을 위해서라도 네 명예를 고수해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세상 사람들이 널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지. 나머지 세상 사람들 처럼 그들 또한 헌신적이며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주렴 네 인생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걸 보여 줘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평생 과업이야, 스티븐." 268-9
평생동안 그녀는 영혼을 죄는 기괴한 족쇄와도 같은 이 몸을 끌고 다녀야 했다. 숭배해야 하지만 숭배받아야 할 주인으로부터는 결코 숭배받지 못하는, 격정적이지만 희한하게도 결시리 없는 몸. 그녀는 자기 몸이 불모가 되었으면 했다. 그 몸이 자신을 잔인하다고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326
그런 육욕이 사랑이더냐. 조화롭지 못한 마음과 훈육되지 않은 몸의 부자연스러운 갈망을 사랑이라고 부르다니. 나는 사랑을 했다. 내 말을 듣고 있니? 난 네 아버지를 사랑했어. 네 아버지도 날 사랑했고, 그게 사랑이다. 351
자신의 사랑에 대한 끔찍한 비방과 모욕에 대해서 그녀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만큼은 거부해야 했다. 자기 사랑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모욕하고 먹칠하는 것에서 지켜내야 했다. 그 사랑은 자신의 일부였다. 그 사랑을 지켜낼 수 없다면 그녀 자신을 더 이상 구원할 수 없었다.그런 사랑도 용납될 수 있다고 선언할만한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분연히 일어서거나 아니면 추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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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열렬한 애착의 순간에도, 삶, 말하자면 진정한 삶에는 다시 한 번 다양하고 끝없는 의무와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황금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연인이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 법이다. 227
'넌 작업을 하고 있지 않구나. 하지만 작업이 너의 유일한 무기란다. 세상이 너를 존경하도록 만들 수 있는 무기 말이다. 너의 작업으로 세상을 극복할 수 있어. 그게 네 친구에게 가장 확실한 안식처이자 유일한 안식처가 될 게야. 그러니 명심하려무나. 그런 안식처를 제공하는 건 네 손에 달렸다는걸 말이다, 스티븐.' 229
그녀의 연인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일부터 해야 할 일을 계획하느라, 여태까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안정을 추구하려 했던 환상과 어리석음과 태만을 저주하면서 뜬눈으로 지새웠다. 230
그녀는 나침반이나 지도 없이 황야에서도 미친듯이 사랑했다. 방향타도 없는 배처럼 완다의 감정은 돌풍에 이리저리 시달리면서도 정상인들을 향해 나아가다가 비정상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찢어진 돛과 부러진 돛대를 단 채, 닻을 내릴 항구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곳을 항해했다. 259
이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완다와 같은 도착자들의 황폐한 삶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들을 세상의 비난에 굴복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하는 바로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을 비난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당히 나쁜 사례에 속했다.
(중략) 그런 사례 이외에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관햇도 토로했다. 열심히 일하고 명예롭게 사는 남자와 여자들. 그들 중 소수는 탁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자신이 도착이라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치욕스러운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한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대단히 명예롭게 사는 것 처럼 보이는 이들은, 거짓말 뒤에 숨어서 평화를 바라며 자기 존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하지만 이들은 거짓말이라는 코브라의 독을 자기 가슴에 품고 살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랑마저 부인하고 감춰야 했다. 343-4
그런데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심지어 메리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383
그들은 또 몰려들고 몰려들었다. "넌 감히 우리를 부인하지 못해!"
그들이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메마른 자궁은 열매를 맺었다. 그녀의 자궁은 두려운 불임의 부담으로 쑤시고 아팠다. 격렬하지만 아직 무력한 아이로 인해 쑤시고 아팠다. 그 아이는 헛되이 구원의 권리를 달라고 고함쳤다. 처음에 그들은 신에게, 그다음에는 세상에, 그런 다음에는 스티븐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들은 비난하면서 외쳤다. (중략)
이제 오직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요구만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안으로 수백만 명이 들어왔다. 그것은 두렵고 깊은 천둥소리 같은 목소리였다. 물길이 모여 폭포처럼 요구했다. 그녀의 귓전을 때리는 두려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두뇌를 울리는 목소리였다. 말하려는 의지마저 질식시키는 섬뜩한 부담 앞에서 무릎 꿇게 만드는, 내장까지 속속들이 뒤흔들어 놓는 목소리였다.
"주님이시여."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우리는 믿사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당신께 아뢰었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부활하시어 우리를 지켜주소서. 우리를 인정하소서. 오 주여, 세상 모두 앞에서 우리를 인정해 주소서. 우리에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해 주소서." 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