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사계절
강상중씨의 책을 고르게 된건 이 사람이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가 제일 큰 듯 싶다. 에세이 외의 다른 분야 책도 읽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독서란 가지치는 식으로 뻗어나간다지만, 이 책 다 읽고 조셉 캠벨을 시작하려 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에서 계속 나오는 인물들 - 나쓰메 소세키, 윌리엄 제임스, 에밀 프랑클, 막스 베버-의 저작을 읽고 싶다. 아으으..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을 믿으며 살았지만, 신이 사라진 시대의 사람들은 신에게서 자유로워졌으니 보다 자유로운 개인이 될 줄 알았더니 '돈'을 믿으며 살아간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무언가 '기댈 것'을 찾고, 그것에 자신을 의탁하며 살아가는걸까. 이제, 기댈 것이 없어지고 최소한의 공통적 연결 고리마저 끊어진 채 원자화 된 개인들의 삶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거라고, 차라리 이야기 해주는게 좋다. 공동체 문화에 익숙한 내 부모 세대 이상의 사람들이, 가끔 내 눈에 이상해보이는 것도 아마 그러한 차이 때문이리라.
여담이지만 책 뒤에 추천사를 써준 두 사람이 뜨악하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마지막 장의 얼핏 보면 마냥 희망차보일 수만 있는 글귀들을 바라보며 이 책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고 생각한걸까...
이런 말을 이곳에 써놓기는 부끄럽지만, 내가 공부를 계속 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내가 학문에 좀더 진지하게 임해보고 싶어서였다. 좀 더 진지하고, 치열하게. 누군가는 쿨하지 못하고 제도권 학문에 매달린다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나 자신을 내던질 생각이다. 그리고 솔직히 공학분야에 ... 제도권 밖의 학문 공동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베버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한 최후의 인간"을 의식해서일까요, 비아냥거림을 담아 거기에 등장하는 '인간 유형'을 자본주의적인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최후의 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인간'에 대해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이 무인 존재는 일찍이 인간성이 도달해 본 적이 없는 단계에까지 이미 올랐다고 우쭐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4
요즘 사람들은 자기와 타인의 이해 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네. 이러한 자각은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하루하루 예민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일거수일투족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 되는 거네.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라는 ㄴ사람이 스티번슨을 평가하기를, 그는 거울이 걸린 방에 들어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자기 모습을 비춰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만큼 한시라도 자기를 잊은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네. 오늘날의 추세를 잘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잠을 자도 나, 잠을 깨도 나, 가는 곳마다 이 내가 따라다니니 인간의 언동이 인공적으로 곰상스러워질 뿐이네. 자신도 갑갑해지고 세상도 고통스러워질 뿐이지. 그러니 마치 맞선을 보는 젊은 남녀같은 심정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살아야 하는 거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재인용) 47
그때까지만 해도 자연이나 신이라는 실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질서를 관습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좋든 나쁘든 인생을 끝까지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하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을 일일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자의식이 한없이 비대해져 간 것입니다. 게다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툭툭 분리되어 연결점도 없고 공통의 이해도 없는 상태라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각자는 내면적으로 망상이 비대해지고, 대인 관계에서는 의심암귀가 되어 신경을 소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51-2
자신을 어필하고 싶다는 아주 강한 자기 현시욕을 갖고 있는데도 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나'로 초연하게 있을 수 없고, 타자의 시선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며, 그 결과 신경과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73
지금까지 개인은 가족이나 친족, 지역, 학교라는 작고 친밀한 공동체에 속하고, 그것을 매개로 더 큰 사회에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접근형 사회에서는 그런 것이 일절 필요 없습니다. 목표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개인이 직접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개인에게 좋은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매개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을 그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 것은 보통 개인이 혼자 다 짊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개인의 동향을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지향형이지만 실은 극히 타인지향형이지요. 거기서는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자기 의사를 결정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상대도 같은 것을 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미리 상정하면서 동시에 서로 평가하고, 게다가 그 사이는 반성 작용도 완충 작용도 없는 굉장히 혹독한 상황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83-4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단체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정신병원을 만들어 거기에 가둬 두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사람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87-8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재인용
왜냐하면 진짜 자신이나 자기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다움을 추구하지 않는 자는 틀렸다거나 자기다운 삶의 태도로 사는 사람이 옳다고 하는 다소 단순한 단정이 횡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된 게 아닐까요. 91
'진짜 자기를 찾아라.'
이것이 때로는 강박관념이 되어 사람을 몰아붙이는 경우가 꽤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관에 비추어 '이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좀 더 빛나는 진짜 내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뒹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진짜 찾기의 공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2
제가 진짜가 아니라면 여기 있는 저는 가짜인 걸까요. 어떤 사람일까요. 투명인간일까요. '진짜가 되어라' 라는 이 표현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진짜가 되고 싶다', '자기답고 싶다'라고 필사적이 되는 데에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5
천하에 무엇이 약이 되느냐 하면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은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은 없다. 예술 작품이 소중한 것은 황홀하여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잊고 자타의 구별을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105 (나쓰메 소세키, 단편 재인용)
만약 진짜 자기라는 것에 진정으로 집착한다면, 오히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찾아라'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겠지요. (중략) '진짜 찾기, 자기답고 싶다는 바람이 자신에게 충실하려는 근대적인 자아의 한 가지 '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때로는 내셔널리즘이나 신경증적인 병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06-7
왜냐하면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이고, 그 대상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헛돌기만 하던 고리같은 것이 뚝 끊어지고 의미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저 혼자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의미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34
'진지함'이라는 말은 바야흐로 다가올 개인이 궁극적으로 고독한 시대에, 타자와의 '공명'을 가능케 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소세키가 마음을 의탁한 티워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베버 역시 지의 합리화와 전문화에 의해 세계의 의미가 뿔뿔이 해체되어 가는 가운데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지적 성실'이라고 했습니다.147-8
'자연은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회는 바꿀 수 없다'고 새각하는 것입니다. '오만'과 '태만'의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요. 154
그리고 죽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삶의 존엄함도 알 수 없게 되엇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을 때는 목숨이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때문에 죽음을 멀리 쫓아버리는데 열심이었는데, 죽음을 멀리 쫓아 버렸더니 이번에는 삶의 소중함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168
그러므로 사소하다고 해도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바람직할 것입니다. 쓸데없이 뭔가를 시기하거나 선망하거나 원한에 빠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각자 자기 안에서 '이걸로 됐어'라는 자기 나름의 살아가는 의미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179-180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라는 것이고, 운명을 그저 시키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187